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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고ㅠㅠ 유튜브에서 국어가르치는데 제가 나온다고 했던 문학작품들이 정확히 적중했네요 작년이랑 재작년에도 그랬는데.... 이만하면 수능 쯤에 돗자리 깔아야 할 것 같아요ㅋㅋㅋ 특히 바람이 불어라는 작품 영상에서는 2018학년도에 이육사 나온걸로 봐서 이번에 윤동주 나올 가능성 있다... 라고 했네요 신기가 있을까나요?ㅋㅋ 광우병 사태를 정면을 맞은 전경 세대로서, 저는 시위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도 우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5년 전쯤엔 홍감탱이가 대선에 나오면 찍어주겠다는 말도 하고 다녔었습니다.





극우반공주의 잣대 논리들이대 약산 김원봉 시비질 시작(정작 약산은 공산당원인적도 없거니와 장개석의 국민당 직계군 장교출신으로 장개석의 지원받는 위치였죠. 그때문에 의열단원이던 이육사는 의열단장 약산을 '장개석 끄나풀' 정도로 인식여기고 부정적 시각으로 다뤄보기도했었습니다)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조차 노선 관련(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자체가 문제있다는식으로 몰아가는 반공논리들)으로 시비질거는것들이 많이 보이고있습니다... 이런모습보면 오늘날 한국의 지성은 점점퇴보해간다는 인상을 자주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조선 청년이 눈을 감았다. 그는 ‘겨울’을 봄을 예비하고 있는 ‘강철로 된 무지개’로 여겼던 사람, ‘청포도’와 ‘광야’를 노래했던 시인 이육사(1904~1944)였다. 향년 40세. ㆍ ㆍ ㅡㅡㅡㅡㅡㅡ 이육사 선생이 살아생전 상당한 사회주의자였는데.. 오늘날 이걸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않는다는것.. 사실 일제강점기 시기 독립운동가들 거의 사회주의 사상을 일제에 맞서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당연시하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런데 요즘 뉴라이트,일베충들,엠팍 불펜등 중심으로 오늘날





등과 함께 좌우합작의 도구인 고려혁명당 (1926년)을 만드신 분이죠. 그 때 중국에서도 국공 합작 중에 있었으니까 만주에서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손잡고 일제와 싸우자는 이야기이었습니다. 그런데 1927년에 중국 국공 합작도 파탄나고, 만주에서도 오동진 선생을 비롯한 고려혁명당 간부들이 거의 다 일경에 체포돼 이 초기적 좌우합작의 시도는 아쉽게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교과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잘 안실리겠죠? 전체적으로 교과서들을 보면 항일민족투쟁의 목표로 "독립국가"만 언급하고, 실제 항일투사들이 이 독립국가의 모습을



상신 즉 역사에 있어서는 유물론자가 되려고 하지만 하반신 즉 자연에 있어서는 맑쓰주의를 맛하주의로 요컨대 주관적 관념론으로 변환코저한다. 그러나 그들의 오류는 그들이 맑쓰 이전 사람이 아니고 맑쓰이후 사람인데 일층 더 중대성이 있는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견해는 독일사회민주당내의 철학적 경향 카-ㄹ헬렌텔 그 타의 신 칸트주의에 대하여서도 충분 적용되는바 맑쓰와 칸트를 융화시켜 맑쓰의 철학을 칸트의 철학에 인반시키고자



의의를 명백히 이해하엿든 것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자연과학적 범주 예를들면 생물학적 및 에넬키-론 범주를 사회적 범주로 변하는 것은 단호코 반대하였었다. [사회적 에넬키-론], [사회도태]와 같은 개념은 레-닌의 의견에 의하면 [어리석은 농담이며 맑쓰주의를 직접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생물학적 개념을 사회과학의 영역에 일반적으로 이입하는 것은 한낫 공언이다라고 그는 말하였었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사회현상을 연구한다든가 사회과학의 방법을 지을수는 없는 것이다. 역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모-든 범주의 사회 제 과학에의 무비판적 이입에





발전을 수행하였음도 사실이다. 자연_과학과_유물_변증법 ㅡㅡㅡㅡㅡㅡㅡ 이 칼럼은 1934년 잡지 '대중'지에 시인 이육사 선생이 기고한 글입니다. 이 칼럼에서 이육사 시인은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의 원칙으로 제시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적 전개를 주장하고, 활동목표는 사회주의의 대중화라고 제시해,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조선을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요지를 펼칩니다. 이 칼럼에서 이육사 시인은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했고, 레닌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명백하다. 필자는 상기수처에서 세계관의 구체적 실례를 취하여 레-닌이 여하이 변증법적 입장을 적용하였는가를 지적하였었다. 지금은 변증법 그것을 취급하여 인식의 수단으로서의 변증법의 역할 그 임무 어떠한 의미에서는 그 가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레-닌이 보는 바 변증법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확실히 레-닌은 맑스주의자이였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의 변증법은 맑스나 엥겔스에게 있어서 지시된 것과 다름이 없지마는 그 자신에게 의하여 가 일층 구체적



시인 고문 후유증으로 무장항쟁을 더이상 할 수 없어서 저항의 시를 쓰게 됩니다. 세상을 떠나시던 날 광복을 못 보시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친일파 순사들은 독립후에도 가족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운전 시간만 왕복 6~7시간 될거 같네요. 지난번엔 근정전 다녀왔으니 요번엔 도산서원으로 갑니다~ 간김에 독립운동가/저항시인 이육사 문학관도 들려보고요.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지는 말아야 겠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 세상이어야 하겠습니다. "센터를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아시겠느냐"는 속 검사의 호통이 고약한 공상인 나라여야 하겠습니다. . 공정한 칼, 엄정하게 찌르겠다며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며 문을 열어달라면 기꺼이 목까지도 내어주어야 할까요. 까짓 포토라인에서 사진도 찍으면 어떤가요. 영정사진이 아닌 게 어디냐며 감사의 절을 할 수도 있지 않나요. .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사진 내가 찍으러, 서초동으로 갔습니다. 목은 못주겠으니 목소리만 놓고 왔습니다. 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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